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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겨레 휴심정 - 민들레공동체 이야기 3 (2013.10.8)

한겨레 휴심정 - 치매 장모의 신음과 고함을 들으며 (2013.10.8)

김인수 교장과 장모2-.jpg 

치매 장모를 돌보고 있는 민들레학교 김인수 교장 선생님. 사진 민들레공동체 제공





“김 서방, 안치도(안혀다오).” “왜요, 또.” “오줌 나와, 오줌.” “아이고 어머이, 조금 전에 앉았을 때 누지요.” “아이고 안 돼, 오줌, 오줌 ….”



 누워 계신 장모님을 다시 침대에 앉혀드리고 장모님의 양손을 잡고 일으킨 다음 양손으로 허리를 잡고 바지를 내린다. 허리를 잡은 상태에서 좌변기에 앉혀드린 다음 양손으로 허리를 잡고 바지를 내린다. 허리를 잡은 상태에서 좌변기에 앉혀드린 다음 오줌을 다 누시기를 기다린다. 하루 종일 반복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간호하는 사람의 인내도 바닥나고 짜증이 일어난다. 어머님도 “내가 빨리 죽어야 너거들(너희들) 고생 안 시킬 긴데(안 할 건데)”라고 미안해한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성싶다. 이미 우리는 효자가 되기는커녕 장모님하고 하루하루 지내는 것만 해도 힘겹다.



 장모님이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신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간다. 거창에 혼자 계시면서 새로 지은 집의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왼쪽 무릎 부분이 함몰될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이내 곧 죽음을 예상했는지 장모님께서는 팔남매 중 여섯째인 아내에게 전화해서 우리에게로 오신 것이다. 모든 식구들을 불러 모아 유언까지 해서 장례까지 논의했는데, 그 뒤 놀랍게도 몸이 회복되시면서 벌써 10년 가까이를 함께 살고 있다.



 애초 장모님은 후덕한 분이었다.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생일 날짜를 일일이 기억할 만큼 총기가 있고 농사일과 세상사에도 밝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불과 1년 전 건강할 때의 일이었다. 이제 남의 손이 아니면 일어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용변도, 외출도 불가능하다. 또 몸의 통증을 호소하는 신음 소리와 절망스런 고함이 밤마다 끊이질 않는다. 아내나 나나 장모님을 간호하기에 한계가 왔다. 낮에는 공동체 식구들이나 학생들이 돌봐드리기도 하지만 밤은 고스란히 우리 식구들이 버티는 긴긴 어둠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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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인 민들레공동체 창립자 김인수 민들레학교 교장.







 고통당하는 이를 섬기는 것의 어려움



 장모님을 간호하며 몸으로 깨달은 게 있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 부모니깐 당연히 모셔야지”라는 혈육과 의무감으로 섬기지만 이것은 대부분 다툼과 불화로 끝날 때가 많다. 아내와 나 역시 여러 번 장모님과 다투고 여러 번 화해하고 서로의 처지를 바닥까지 주고받으면서 피차 눈물과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불쌍하니깐 섬겨야지”라는 인간적인 동정심과 감정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런 동정심은 여러 날, 밤을 지내다 보면 한계에 봉착한다.



선천적으로 이타심이 많고 자기보다 남을 돌보는 게 습관이 된 사람조차 그의 천성은 시험받게 되고 더 큰 좌절과 원망으로 떠나게 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고 우리의 마땅한 신앙이라고 믿으면서 의지와 신념을 앞세우는 사람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혈육의 의무감이든 동정심이든 논리와 의지의 힘이든 이타적 본성이든 모든 동기는 고통당한 단 한 사람을 살리는 데도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섬기다가 다 나자빠질 수밖에 없다. 절망하고 포기하고 무시하고 달아난다. 문제는 우리는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 견딜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장모님의 요구는 5분도 그치지 않는다. 앉혀 달라, 눕혀 달라, 세워 달라, 물 달라, 배고프다, 이야기해 달라, 용변 뉘어 달라….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장모님 입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절망과 좌절과 고통의 단어들이다. “죽는다” “죽고 싶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모든 생각과 동작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 그런 와중에 애통함, 탄식, 한숨, 자식과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토해낸다.



 장모님은 때때로 단순한 원망과 한탄뿐 아니라 자식과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악담과 저주를 퍼붓곤 한다. 자신의 살아오신 삶이나 성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두움을 드러낸다. 우리 또한 그러지 말라고 장모님에게 하소연해본다. 그러나 그것이 노환을 지내고 있는 노인들의 자기표현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치매 어머니를 돌보면서 자연의 기록을 남긴 전국귀농협회 전희식 선생의 <똥꽃>에 ‘노인들의 악담과 저주, 또는 의심과 불안 증세는 질병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일종의 치유 과정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 또한 그 주장에 동감한다. 장모님의 비상식적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언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아이가 되는 과정이고 그 과정이 때로는 유치해 보이긴 해도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한 자락이라고 여겨진다.

 



 무력한 한 사람이 나를 뒤흔든다



 문제는 간호하는 사람, 주위에 지키고 있어야 할 사람, 즉 우리가 변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변화되시오”라고 요구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변형의 체험은 우리 인생에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직접 상당 기간 함께 살아가는 몰입된 경험이 있게 되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일종의 변형 경험을 겪게 된다.



 고통당하고 병들어 있는 한 인간, 보잘것없고 죽어가는 한 인간을 저버릴 수 없다는 양심의 호소가 변화를 요청한다. 간단히 말하면 죽어가는 고통 중의 한 인간은 사람을 각성케 한다. 그 무력한 한 사람이 나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이 과정을 순순히 따르는 자는 깊이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분노와 인내의 한계, 논리와 비논리의 갈등,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 그리고 의무와 권리 사이에 왔다 갔다 하면서 비로소 어떤 고요함을 문득 느낀다. 눅눅한 장마의 먹구름 속에 문득 한 조각 파란 하늘을 보고 ‘아! 그렇지, 하늘은 파랗지!’라는 새삼스런 발견과도 같다. 이때 짜증 속에서 불현듯 미소와 농담이 터질 수 있다.



 말의 일치가 침묵에서 비롯되듯, 두 인격의 일치가 확인될 때 고요에 이른다. 이 고요 속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통의 한계와 연약함 속에 깊이 숨겨진 고귀함, 어떤 일체감, 어떤 해방감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은 감정의 격변이 아니다. 그 경험 속에 깃든 고통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죄성으로 말미암아 그 불완전 속에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인간성의 희망적 요소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의지로 하려다 넘어진 그 선에서 확인되는 의지 이전의 의지, 감정 이전의 감정, 지식 이전의 지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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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민들레학교 교장과 치매를 앓고 있는 장모.  사진 민들레공동체 제공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



 물론 고요함의 각성이 있었다고 해서 계속되는 고통과 인내의 수고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통과 연약함을 경험하는 사람에 대하여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넓고 가벼운 마음을 얻으며 빙그레 미소 지을 수 있다. 비로소 우리는 인간 존엄의 신비라 일컬어질 수 있는 경험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 존엄의 주제는 결코 살아있는 한 인간과 나와 독립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인식은 사실 종잇조각과 같을 따름이다. 그것은 참으로 허약한 고백이다. 그것은 마치 뱀은 징그럽다, 물은 시원하다는 판단과 비슷하다. 인간 존엄은 인간관계 속에서 갖게 되는 어떤 경험이다. 공동체적으로 갖게 되는 경험이다.



 고통 받는 사람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존재의 뿌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자양분을 공유하게 하는 공감의 시간이고, 우리가 잊고 있던 영원한 것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과 만나서 형성되는 이러한 공감과 고요함 그리고 그 속에서 회복되는 것은 죄로 파괴된 인간 존엄의 신성한 현현이다.



 김인수 민들레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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