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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자유인

왜 우리는 기독교 대안학교를 시작하려는가?



  온 세상이 ‘지식사회’로 나아가고 있고 그것을 위한 학습열의와 투자가 숨이 찰 지경이며, OECD 29번째 가입국인 우리나라로서 최근 2004년 OECD 교육장관회의 의제인 ‘모든 이를 위한 학습의 질 향상(Raising the Quality of Learning for All)’ 이라는 고상한 목표제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우리의 교육이 나아 질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의 양심이 일깨우는바 참다운 교육의 미래를 어떻게 꿈꿀 수 있겠는가?


1. 공교육에 대한 생각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성을 두 가지로 들라면 나는 자유와 공동체를 향유하는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자유 

  자유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인격으로서의 자립적인 사고와 자립적인 물질생활 그리고 자립적인 세계건설을 가능케 하는 자질로서 심지어 하나님조차 그 자유를 침범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그간의 학교교육과 교육정책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 자유를 배우고 향유하기보다 그 자유를 유보케 하고 실질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는 비인간적 세월을 보내왔다, 얼마 전 공동체를 방문한, 기존학교를 그만두고 대안교육을 받고 있는 세 아이에게 “학교 안가니 뭐가 좋더니?” 하고 물었더니, 세 아이 모두 한결같이 ‘자유로워서’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지만 자신의 견해를 소신 있게 피력할 수 있는 독창적이고도 빛나는 언어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스스로 자존감과 끈기를 가지고 손으로 집지으며, 농사지으며, 옷 짓는 물질생활을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느새 돈 버는 것 외에는 진지한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나날이 폭력과 전쟁이 심화되어가는 불안한 세상 속에서 ‘창의적 평화(creative peace)’- 예를 들면 코스타리카처럼 군대 없는 나라의 가능성(아직 우리는 대체 복무제도 논란중이다)이라든지 인류평화를 위한 국가리더십 같은 말은 들은 바도 없다. (여전히 ‘국익’만 되뇌인다)- 의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교육이 참된 인간을 만들고 물질과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생명과 평화를 보편적으로 자리 잡는 인류애를 촉진시킬 수 있는가 질문할 때 우리는 유감스럽게 ‘아니다’라고 말할 도리밖에…. 자유는 인간인 우리로서는 모든 가치가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다.

  미국의 어느 혁명가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다지만’, 우리의 교육실정은 ‘자유를 줄 테니 성적을 달라고’ 학생, 학부모 전부가 부르짖고 있다.

  나는 노예적 심리의 사회적 현상이 권력에서는 굴종과 폭력의 형태로, 돈(물질)에서는 탐욕과 빈곤의 현상으로, 성적욕구에서는 쾌락과 공허함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진정한 자유를 배워가는 사람은 권력에 대해서는 참된 순종과 불가피한 불복종정신으로, 돈과 물질에서는 나눔과 더불어 부요함으로, 성적욕구에서는 절제와 일치로 드러난다고 믿는다.

  사실 이 세상의 많은 문제는 자유를 올바르게 배우고 향유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사회의 폭력과 탐욕 그리고 쾌락지향주의는 참된 자유를 가르치지 못한 교육의 일차적인 죄과이다.


공동체

  인간의 고귀한 두 번째 특성은 공동체정신이다. 자연계에서도 개미라든지 집단생활 하는 짐승들도 많이 있고 자연 그 자체가 공동체이지만 우리 인간은 어쩌면 공동체정신과 생태적 관계를 맺은 데서 가장 퇴화적인 생물종이 아닐까 싶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케 된다고 믿는다.

  학교는 인류의 보편가치인 공동체정신을 뒤로 물러가게 했고, 우정(friendship) 조차 경쟁적 입시체제로 인해 붕괴되었고, 철저한 개인주의화와 집단화의 양극에서 인격적 교감을 갖지 못한 수많은 학생들은 왕따와 자퇴 그리고 자살로 내몰리는 기가 막힌 현실이 오늘 우리의 교육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弘益) 교육이념은 한 번도 실천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의 위선적 교육교시가 되어버렸다.

  공동체는 성숙해 가는 동안 자기부인, 일치와 평화, 그리고 영화로움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자기부인은 우리의 자유의 지평이 무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기중심성에서 타자중심성으로 나의 고집과 편견에서 합리적 조정과 대화로, 다르다는 것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배우게 되며 그것은 결국 예수의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우리를 추돌한다. 일치와 평화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운 삶이 더불어 살고, 일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요해질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된다. 참된 성숙과 행복은 아내와 남편 사이의 일치에, 진정한 교육은 학생과 교사간의 더 넓고 먼 진리의 여행에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일체감과 평화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영광은 마침내 인류가 도달해야 할 ‘온전함’의 선물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인간에게 소박함 속에 깃들인 품위로, 남녀 간의 부끄럼 없고 존경할만한 언어의 형태로, 우리문화의 역동적인 경탄으로 드러내며, 영원에 대한 신뢰와 신에 대한 공경으로 드러나곤 한다. 하나님은 영화스러운 분이시며 우리 역시 그 영화에 진입하며 영화롭게 되기를 희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로 인해 충분히 영화로우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결속된 그 공동체성,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양식인 공동체 그 자체가 영화로운 것이다. 참된 공동체는 영광의 섬광을 비추이게 되어있다.

  M. 스캇 펙은 그의 책 <평화의 북소리- 공동체로 가는 길>에서 서문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세계의 구원은 공동체 내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존재 한다”고.

  우리 교육은 자기부인이라든지 일치와 평화 더군다나 영광스러움마저 떠나 간지 오래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교육은 공동체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배반한 교육이 되어버렸다. 우리 교육은 결국 우리를 완성케 하지도, 심지어 구원케 하지도 못했다.


2. 기독교 교육에 대한 생각

  기독교는 이 세상의 구원과 완성이라는 궁극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이해로 미션스쿨(mission school)은 교회 밖의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독교학교(christian school)은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려는 성화의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최근까지 들려오는 미션학교와 기독교학교의 실망스런 보도는 비종교인들로서도 수긍할 수 없는 영성적 한계를 노출시킨 셈이다.

  기독교교육은 민주주의의 고취, 여성인권 확장, 문해교육, 어린이에 대한 관심, 민족지도자 배출, 근대화에  활력공급, 국제화시대개척이라는 100여 년간 한국 사회에 미친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배타성, 엘리트주의, 가난한자에 대한 무관심, 물질주의, 분열된 복음이라는 문제에 잡혀있었다.



배타성

  우리는 진리의 우월함과 아울러 보편성을 믿는다,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 또한 믿는다. 그리고 예수중심 구원의 유일성과 예수영접과 성령체험의 내재성의 강조가 하나님 임재의 보편성과 신의 초월적 사역을 압도함으로 말미암아 세계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무시 내지는 간과, 인류문화와 유산에 대하 과소평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다양성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계는 평화를 만드는 능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오히려 진리의 이름으로 전쟁을 지지하고 긴장을 장기화시키는 폭력에 기여해왔다.


엘리트주의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라’는 이야기, 더 많은 부와 더 큰 세력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 경쟁사다리의 정점에 이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최고최강의 실력을 갖추라는 이야기, 이 모든 것은 능력 있고, 여건이 되는 사람들에겐 도전할 만한 삶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침묵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는 이류인생의 길을 걷게 만든다.

  사람들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다른데 어찌 모두 다 공부 잘하고, 모두 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모두 다 많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엘리트주의에는 세상을 보는 편향된 시각이 자라게 되며 인간에 대한 무례를 저지르게 된다.


물질주의

  나는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물질주의의 지배,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돈의 지배에 연루되지 못한 곳을 거의 볼 수가 없다. 부자가 되어보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경고와, 부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인자한 권유가(딤전 6:9~10, 17~19) 신중하게 가르쳐졌는가 의문이 든다.

  물질주의가 저지르는 가장 큰 불의는 무한가치인 인간존재를 물질가치인 소유여부로 판단해 버리고 인간에게 주신 신령한 가능성을 박탈해 버리는 우상화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마 6:24) 실질적인 우상숭배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치며 기도하고 예배해도 참된 자유로움과 신성을 누리지 못하는 이상한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3년 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과 독일의 유수한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로부터 배웠지만 그 3년간 단 한번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 무엇보다 손으로 일하는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없다. 다시 말하면 신학교든 교회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눅 4:18, 7:22)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를 스스로 폐기한 느낌이다.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게 행했던 바를 우리는 단지 꿈에서 한 번씩 그려보는 정도이다. 인류의 12억이 1달러 미만의 절대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우리 정부의 원조규모는 국민소득대비 0.06%밖에 안 되며(1인당 원조액 8달러) 기독교 선교사들의 빈곤퇴치능력은 구제에서 개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많은 재정은 가난을 해결하는 직접행동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중심으로 고백하는 제자가 보기 드물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이 가난한 자와 더불어 살겠다는 삶의 변화로, 마침내는 자신조차 가난한 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가난의 소명을 이루려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희귀종족이 되어버렸다.


분열된 복음

  작고하신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평생 동안 현대 기독교는 분열된 복음에서 온전한 복음으로 나아갈 것을 외치셨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날카로운 대치, 성령운동과 사회변혁운동의 갈등을 통합하실 것을, 그리하여 성경이 가르치는바 ‘모든 것(마 28:20, 행 20:27)’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영혼구원과 복음전도, 교회개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세계기독교사에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 냈으나 세상사를 하나님의 주권(Lordship)으로 이끌어 들이고 그 의미를 풍성케 하려는 시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미숙한 상황이다.

기독교 120년 역사상 아직 우리사회, 아니 우리 교회 안에서 조차 균형 있는 기독교가치관은 소수 배운 자들과 학회의 토론거리이지 시장에서 일하시는 김집사님, 교회의 주일학교 학생의 일상에서의 관심거리는 요원하다.

  생각이 결과를 낳건만(Ideas have Consequences) 바른 생각을 키워오지 못한 한국 기독교는 고통스런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3. 새로운 학교를 꿈꾸며

  우리는 왜 또 다른 기독교 대안교육을 꿈꾸는가? 공교육이 빼앗은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를 우리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려는 것이 어찌 더 늦출 수 있는 일인가? 사람됨의 가장 근본바탕인 자유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풀어내고 오늘 현실의 문제에 직면케 하며 미래를 성실히 꿈꿀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단련될 수 있는 자기부인과 섬김의 삶, 일치와 평화를 만들어내는 기쁨, 마침내는 하늘나라와 방불한 영광스러움을 이 땅에서 누리도록 헌신케 하는 이 기이한 일을 우리는 꿈꾸고 있다.

  기독교회와 기독교교육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나누고 비신자와 신자를 나누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면서 키워 온 영지주의의 폐단은 타문화와 타신앙에 대한 불필요한 배타성과 엘리트주의를 키워왔다면 현실에서는 돈이 근본이 되는 물질주의적 욕망과 그에 따른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관심을 방치해 왔으며 이 모든 것은 성경의 가치관을 균형 있게 풀어내지 못한 해석학상의 딜레마에 우리 교회와 교육이 직면해 있다고 본다.

  사실 종교와 교육과 언론은 우리 사회에서 가치관을 형성케 하는 3대 기관이랄 수 있다. 그 가치관은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케 하고 그것은 마침내 사회 속에서 평화와 폭력이라는 직접적인 생활양식으로 표현되게 되어있다.

  종교는 진리를 가르치고, 교육은 진리를 좇아 살게 만들고, 언론은 진리(진실)를 표현하는 기관으로서 그 유일의 목적이 진리(진실)를 생산하고 익히며 나누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기관과 교육기관과 언론의 부패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타락하고 세속화된 집단으로 폄하된다. 이미 돈의 권세에 눌려있는 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와 교육,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부자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래서야 어찌 진실을 선포하며 진실을 가르치며 진실을 쓰고 나눌 수 있겠는가?

언론이 기업에 잡혀있고 교육이 학벌에 잡혀있고 종교가 물질주의에 잡혀있는 한 진정한 가치생산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생산을 위한 본래적 의미로서의 교육과 신앙운동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다. 민들레학교는 하나님이 허락한 부요를 가난한 자와 나누며, 할 수 있으면 가난한 영성을 지키며 돈과 소유에 몰두된 세상으로 하여금 돌이켜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사회, 사람들로 하여금 겸애(謙愛)와 용의(勇義)를 좇아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죄의 권세와 돈의 권세를 극복한 순수기독교의 맑은 물줄기를 되찾기를 바라는 열망인 것이다.